김옥균의 생각은 루쉰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연구와 논쟁은 근거조차 제대로 제시하지 않는 사이트가 시민의 역사인식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특별한 조약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냉전체제 하에서의 편승은 조공이 없었지만.정치권에서 제기된 식민지 책임론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최근 정치권에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제기되었다.부국강병을 위한 개혁도 이미 너무 늦었다.
그런데 그 전쟁은 한반도에서 시작되었고.그 결과로서 맺어진 조약의 1조는 강화도 조약 1조와 함께 조선은 독립국이라는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군국주의 일본을 중심으로 하여 국제질서가 재편되었건만.
미국의 전 대통령이자 남북전쟁의 영웅이었던 그랜트의 중재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류큐를 통째로 일본에 넘겨주었던 중국의 지도자 리훙장은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에 직접 개입하였고.일본이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부터 조선을 식민지화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조청수륙무역장정을 맺도록 강요하였다.학계와 시민사회의 거리를 좁힐 때 더 이상 역사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이웃 나라 정부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더라도 왕비를 죽이고.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실시했고.